전시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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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집은 어디인가

    세계한민족미술대축제 <우리 집은 어디인가>를 열면서

    윤범모 (전 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1. 우리 집은 어디인가

    세계한민족 미술대축제. 이렇듯 거룩한 이름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미술 행사를 마련했다. 지구촌 도처에서 살고 있는 한민족, 정말 해외의 웬만한 도시에 가면 코리안을 만날 수 있고 또 한국식당도 볼 수 있다. 위대한 코리안의 후예들이다. 현재 해외 거주 코리안의 숫자는 약 750만 명 정도이다. 이들 동포는 중국과 미국이 과반수를 넘을 정도로 많고, 그 다음은 일본, 그리고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1만 명이 넘는다. 이는 해외 이주의 역사 1세기를 넘긴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의 해외이주는 경제적 이유의 열악한 환경에서였다. 그래서 농민 출신이 많았고, 이들은 현지에서 노동자로 밑바닥 삶을 살아야 했다. 1960년대 이후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주한 경우와는 성격부터 달랐다. 디아스포라, 이는 타의에 의한 이산의 경우를 말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이런 의미에서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주요 도시에 코리안 타운도 형성했고, 또 훌륭한 인물도 많이 나와 코리안의 위상을 높이는 사례도 많아졌다. 이런 바탕에서 한민족 미술축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사단법인 한민족미술교류협회는 세 번째로 ‘평화/ 상생/ 공존’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세계한민족 미술대축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전시 취지는 단순하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에 평화와 공존을 기도하면서 미술 축제를 갖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해외작가로 중국과 일본, 북미와 남미, 유럽,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등 60여 명, 그리고 북한작가 20명까지 참여하도록 안배했다. 물론 국내 작가 120 명도 동참한다. 미술전시 사업이기는 하지만 대륙별 안배에 따라 작가도 초청하여 서울 행사를 화려하게 빛낼 수 있게 했다. 글로벌 네트 워크의 미술판 행사라 할 수 있다. 과연 해외동포 미술가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기획회의에서 나는 전시 제목으로 <우리 집은 어디인가>를 제안했다. ‘우리 집’, 정말 특이한 표현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의식이 곁들여져 있다. ‘나의 집’이 아니고 ‘우리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말에 ‘우리 엄마’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 같은 표현법이 있다. 내용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표현법이지만, 우리네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용어이다. ‘나의 남편’이지 ‘우리 남편’은 없다. 마찬가지로 ‘나의 집’이 아니고 ‘우리 집’이라고 표현할 때의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그건 그렇고, 현대사회는 물리적 우리 집보다 정신적 우리 집의 비중을 염두에 두게 한다. 특정 공간에 위치한 우리 집보다 상징적 혹은 시공 초월의 내용적 우리 집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거주지는 중앙아시아이건, 남미이건, 코리안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 집’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질문, 바로 우리 집은 어디인가. 대답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고향이며, 또 그곳이 우리 집이 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 우리 집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버릴 수 없다. 특히 혈통과 무관하게 현재의 국적만 가지고 따질 때, 현재의 우리 집 주소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민족 축제는 의의가 적지 않다. 지구촌 시대의 우리 집, 과연 우리 집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이번 미술전시가 일말의 단서라도 제공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한다.

    2. 지구촌의 코리안 미술가

    세계한민족 미술축제를 위해 무엇보다 진행해야 할 작업은 작가의 현황파악이었다. 글자 그대로 지구촌을 대상으로 했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 등 평소 왕래가 빈번하지 않은 지역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답사 혹은 다양한 방식을 통하여 작가명단을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참여작가를 선정했다. 이번 전시는 공간 사정 등 여러 가지를 검토하여 현역작가 중심으로, 그것도 다양성을 우선시하는 원칙을 내세웠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작고작가의 역사적 위상을 간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중국의 한낙연 같은 화가나 일본의 조양규, 송영옥 같은 화가의 존재감은 우뚝 솟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는 현역 중심으로 꾸몄다.

    대륙별 참가 현황을 보면, 프랑스, 독일, 영국, 스웨덴, 네델란드 등 유럽작가 10여 명, 미국의 8명, 러시아 이외 중앙아시아 경우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6명, 남미의 5명 등 다양한 편이다. 이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화가로 쿠바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알리시아 박은 애니깽 3세 화가이다. 애니깽이라면 사탕수수 밭 노동자로 이주한 고난의 상징적 존재이다. 이민 초기의 사례로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애니깽 후예 가운데 예술가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알리시아 박의 경우는 미수교 국가인 쿠바 거주의 작가여서 특히 눈길을 끈다. 게다가 그의 아들 4세도 화가이고, 그의 남편 쿠바인도 화가일 정도로 미술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번 행사에 애니깽 3세와 4세의 모자(母子) 참가는 상징성을 크게 띄고 있다. 해외 이주의 아픈 역사를 딛고 이제 예술이라는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있는 사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김윤신의 경우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서울에서의 대학교수 자리를 버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여 작업하고 있다. 목재가 풍부하고 작업환경이 좋은 현지에서 목조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현지에서 개인 미술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을 만큼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해외 동포하면 중국과 일본의 경우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 한반도의 주변 국가로서 실제로 동포의 숫자가 많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국가 거주의 동포는 성격부터 다르게 한다. 무엇보다 중국이나 미국의 경우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편이다. 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지도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무엇보다 분단 조국의 현실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하면서 택일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분단은 남한 지지의 민단 계열과 북한 지지의 총련 계열로 나뉘어 대결 구도를 갖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사회의 ‘조선인 차별’을 실감해야 하는 현실에서 동족끼리의 이데올로기 대결은 긴장된 일상을 영위하게 했다. 그래서 김석출이나 홍성익 같은 화가의 작품은 소재부터 남다를 정도로 이색적이다. 홍성익은 도쿄의 조선대학 출신이다. 총련은 일본 각지에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우리 말’ 교육을 실시해 왔다. 거기다 대학까지 설치하여 미술과를 운영한 바, 많은 숫자의 작가를 양성하기도 했다. 이 점은 특별하게 교육시설을 두지 않은 민단 계열과 비교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북한미술의 경우는 특기 사항이다. 근래 잃어버린 10년 세월은 남북교류 프로젝트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하지만 촛불 혁명을 거치고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있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핵무기 폐기 수순을 밟고 있으며, 통일조국으로 향한 남북 정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단절되었던 대북 관계의 개선을 다양한 각도에서 시도하게 한다. 1980-90년대 활발했던 남북 미술 교류사업도 복원하게 추동하고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교류는 쌍방 통행이어야 한다. 그 당시 남한사회에서의 다양한 북한미술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시선을 제공했다. 나는 <그리운 산하>라는 최초의 북한미술전시를 서울에서 진행한 경험을 갖고 있고, 뒤에 방북하여 평양 미술계를 둘러보고 [평양미술기행]이라는 저서도 출판한 바 있다. 이제 새로운 정국은 남북 미술교류 사업의 본격적 실현을 추동하고 있다. 애초 계획대로 평양 작가의 서울 초청은 어렵게 되었지만, 가까운 시일 내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의 왕래까지 가능한 환경 조성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축제는 유화 중심의 20점을 진열한다. 물론 북한미술의 핵심은 ‘조선화’이다. 선명하고 간결한 채색 중심의 사실주의 기법의 그림을 일컫는다. 유화 작품조차 조선화의 분위기를 연상시킬 만큼 평양미술의 특징을 이루어 왔다. 근래 화풍의 변화를 보게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체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0명 이상이 참가하는 국내 작가의 경우, 무엇보다 다양성이란 기치를 내세웠다. 원로화가로부터 신진까지, 출신 배경이나 화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모를 안배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비중을 크게 두어 향후 ‘코리안 미술’의 미래를 염두에 두게 했다. 출품작가 가운데 김선두, 김준권, 노원희, 박대성, 석철주, 안종연, 유근택, 이상봉, 이이남, 이종구, 정종미, 주재환,주태석, 허달용, 허진, 황재형 같은 면면도 볼 수 있다. 이는 ‘축제’ 성격에 맞는 ‘화려한 잔치’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들 국내 작가와 해외 거주 동포작가의 동석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축제의 성격을 강조하게 한다. 우선 상호 존재 확인 작업부터 이루어진 이후 진정한 의미의 교류와 방향성 제시 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 문화영토의 주역과 예술활동

    예전에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국가의 위상을 점치기도 했다. 국토의 넓이가 국력과 비례한다고 보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한반도는 소국이었고, 그래서 정치 경제적 약소국 대열에 끼어 있었다. 물론 20세기의 한반도 운명은 불행했다. 전반부는 식민지였고, 후반부는 분단 시대였다. 그 복판에 전쟁이라는 커다란 비극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해외 이주의 슬픈 역사를 두텁게 했다. 하지만 한국의 국력은 날로 발전하여 이제 지구상에서 존재감을 높게 들어내고 있다. 전쟁 이후 원조 받는 나라에서 이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했으며, 문화적으로도 위상을 제고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로 한류(韓流)를 들 수 있다. 구미지역은 물론 동남아시아나 아랍지역까지의 한류 열풍은 드세게 불고 있다. 이제 대중문화에서 이른바 고급문화로 이행되어야 할 순서이기도 하다.

    지도상의 국토 의미 보다 문화적 내용상의 의미를 따지게 하는 작금의 국제 상황이다. 그래서 ‘문화 영토’라는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비록 국토는 작지만 코리안의 문화적 역량은 세계적 수준임을 고려할 때, 우리는 문화적 영토를 염두에 두고 국가 운영을 시도하게 한다. 해외 동포 750만 명 수준, 이는 정말 ‘세계적’ 수준이지 않을 수 없다. 지구촌의 웬만한 도시라면 코리안의 후예가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국력을 상징하는 부분이다. 이들 해외 동포 가운데 문화예술인의 숫자도 적지 않아 새삼 주목하게 한다. 이제 코리안의 문화 영토는 국제사회에서 강국임을 이해하게 한다. 코리안 문화영토는 결코 약소국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 차원에서 해외 동포를 위한 체계적이고도 실질적인 정책이 절실한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특히 문화 예술가를 위한 지원정책의 적극적 시행도 고려해야 한다. 코리안 문화영토. 이러한 개념 아래 이번 세계한민족 미술축제를 마련하려 했다. 구미지역 중심의 미술을 국내로 반입시키는 프로젝트 이상으로 해외 거주 코리안의 예술을 관리 지원하는 정책도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자 함이다.

    세계한민족 미술축제. 이제 소박한 발걸음 내딛게 되었다. 민간 차원에서 실행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부족함 속에서 아쉬움을 딛고 의지를 내보이는 자리이다. 문화 영토 속에서 우리 집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정말 현대사회에서의 우리 집이 주는 상징성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질문하게 한다. 우리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our home

    Celebrating the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Yun, Beommo (Former chair professor at Dongguk University / Exhibition Director)

    1. Where is our home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We’ve worked for arranging an art event with such a divine name at Seoul Arts Center. The Korean race is living everywhere in the world and we can see Koreans and Korean restaurants almost in any foreign cities. What a great descendant of Korea! The current number of Koreans living abroad is approximately 7.5 million. More than half of them are in China and America, followed by Japan, Europe and Southeast Asia and even Africa with population over ten thousand. History of emigration over a century has reached this point today. Emigration in the late 19th or early 20th century was naturally due to economic reasons and poor surroundings. Thus, most of emigrants were farmers and they had to live as a laborer in the gutter. Their living was far from emigration to America or Europe after 1960s. Diaspora refers to separation forced by others. In that sense, Korean diaspora has gone through tragedy. However, they have formed Korean towns in major cities over time with respectable figures coming from those communities, which has raised the status of Koreans. These foundations have enabled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Working on the project of ‘peace / win-win / coexistence’ for the third time, Korean People Art Sharing Association is to hold the upcoming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The exhibition aims a simple notion; praying for peace and coexistence in Korea, the only divided nation in the world, with art festival. The exhibition has involved sixty artists from China, Japan, North and South America, Europe, Russia and Central Asia and twenty North Korean artists as well. One hundred and twenty domestic artists also participate in the event. Though it is an art exhibition project, it invites artists from different continents as well to ornament the event held in Seoul. It makes an art event on global network. I wonder where Korean artists abroad would lie today.

    I suggested the exhibition title of at the planning meeting. ‘Our home.’ It is such a distinctive expression. The word ‘our’ here is with community spirit unique to our Korean race because it is ‘our home,’ not ‘my home.’ It reminds me of Korean expressions of ‘our mom,’ ‘our wife’ and ‘our husband.’ It does not make any sense literally but we use them anywhere, any time in our daily life. ‘My husband’ works, not ‘our husband.’ When we use the expression of ‘our home’ instead of ‘my home,’ we realize community spirit yet again. By the way, modern society puts more emphasis on our home in a mental sense over physical existence of it. It is because such notion enables us to imagine a more symbolic or content-associated our home that transcends time and space than our home located at a specific place. We can share ‘our home’ all together with ones who have identity as Korean in spite of actual residence in Central Asia or South America through the very question of where is our home. The answer would be where one puts one’s foot down is his hometown and that makes our home as well. Nevertheless, we cannot suppress our desire to exactly locate our home. In terms of current nationality regardless of ancestries in particular, we try to identify the address of our current home. Significance of this Korean race festival lies there. Our home in the global era, what is the current state of our home? I expect this exhibition to give a little bit of clue to this question.

    2. Korean artists in global village

    For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we had to examine current state of artists above all things. The festival is literally open to the global village, which made the work difficult to do. It was particularly harder in regions like Central Asia where we’ve been seldom in communication so far. Nevertheless, we prepared a list of artists through on-site surveys and a variety of other channels and based on that list, selected artists to participate. Considering a combination of circumstances including exhibition space, this exhibition put principles of focusing on living artists with stress on diversity. In case of China and Japan, it is of course difficult to overlook historical status of late artists with definite presence of Han Nakyoun in China or Jo Yanggyu and Song Youngok in Japan. This exhibition is still concentrated on living artists.

    Artists from different continents are diversely organized with ten Europeans from France, Germany, England, Sweden and Netherlands; eight from America; six from Kazakhstan and Uzbekistan in Central Asia other than Russia and; five from South America. A Cuban artist particularly catches our eyes. Alicia Maria de la Campa Pak is a third generation immigrant artist of henequén who worked for sugar cane farms, a symbol of hardships in emigrant’s life. It is recorded as an early emigration case. Over time, however, descendants of some henequén appeared as artists. Alicia Maria de la Campa Pak particularly draws attention as she lives in Cuba that has already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with America. In addition, her son is also an artist and so is her Cuban husband, which makes her whole family a home of artists. Participation of this mother and son, descendents of henequén, is of great symbolism to this event. It is because they are an example of art flowering after getting over sufferings of emigration. Kim Yunsin from Argentina also deserves special mention. Abandoning a position of college professor in Seoul, he moved to Buenos Aires for his work. He is an active wooden sculptor with abundant lumber and good working environment there. His individual art gallery shows how elevated his status is in the city.

    The term Koreans abroad first recalls ones in nearby China and Japan where the predominant number of emigrants actually lives. Koreans in China and Japan, however, have distinctive features. China and America has a relatively simple social ideology because they have ruling ideas of socialism and capitalism respectively. However, it is not applied to ones in Japan. Realizing reality of the divided homeland in daily life, they are sometimes forced to choose one. The division has incurred confrontation between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and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that respectively supports South and North Korea. They were already in hardships of ‘discrimination against Koreans’ in Japanese society and ideological confrontation among the same race put them under a greater strain. Thus, works of artists such as Kim Seokchool and Hong Seongik are very much exotic with unique materials. Hong Seongik is from Joseon University in Tokyo.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established ethnic schools throughout Japan and taught ‘Korean language.’ The Association also founded college including department of art, which fostered a number of artists, which is a significant difference compared to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without any educational facilities involved.

    Art in North Korea should be specially noted. The recent decade lost completely blocked South-North exchange projects. After the candlelight revolution and inauguration of Moon Jaein government, however, the good mood of reconciliation has been rapidly created in South-North relations. Nuclear disarmament progress is under way free from horrors of war and both Korean leaders affirmed their will toward unified country. This facilitates improvement of relations with North Korea which used to be broken until recently from various angles. Restoration of South-North art exchange that was active in 1980s and 1990s is also being promoted. True meaning of exchange should of course be two-way communication. A host of the then exhibitions with North Korean artists held in South Korea provided a new perspective toward unknown world. I was involved in the very first North Korea exhibition titled in Seoul and published [Art Trip to Pyongyang] based on actual visit to North Korea to study the world of North Korean art. The new phasis now drives full-scale realization of South-North art exchange project. Though we could not invite Pyongyang artists to Seoul as planned, we expect environment to be created for exchanging both works and artists before long. This exhibition displays twenty pieces of works, mainly oil painting. The core of North Korean art is of course ‘Joseon painting,’ which refers to realistic drawings with vivid and simple coloring. It is a remarkable feature of Pyongyang art; even oil painting recalls atmosphere of Joseon painting. In spite of recent changes in style, we can see that North Korean art keeps the substance of socialist realism.

    With more than one hundred and twenty domestic artists involved, we clarified the value of diversity. We arranged multiple aspects from elder artists to rising ones with different backgrounds and styles of painting. We put more focus on young artists to think of future of ‘Korean art.’ Participating artist features Kim Seondu, Kim Junkwon, Noh Wonhee, Park Daeseong, Seok Cheolju, An Jongyeon, Yu Geuntaek, Lee Sangbong, Lee Yinam, Lee Jonggu, Jeong Jongmi, Ju Jaehwan, Ju Taeseok, Heo Dalyong, Heo Jin, Hwang Jaehyeong, etc. They would make this ‘festival’ perfectly be a ‘splendid feast.’ Company of domestic and overseas Korean artists would speak volumes and consequently, stress the nature as a festival. It is because mutual identification is required to facilitate true meaning of exchange and to suggest directivity.

    3. Driving force of cultural territory and artistic activities

    People used to predict a nation’s status on a world map, thinking that size of territory would represent national power. In that sense, the Korean Peninsula was a small country, rated as a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small and weak nation. Misfortune on the Korean Peninsula continued until 20th century; colonized in the first half and then divided in the latter half. There was a huge tragedy of war in the middle of misfortune. Those led to thickening our sad history of emigration. With relentless growth of Korean national power, however, our nation has raised its status around the globe. We have turned from aid receiving country to aid giving country now after the war. We have emerged as one of the world’s largest economies with enhanced status in the world of art as well, which is well demonstrated by the Korean Wave sweeping not only the West but Southeast Asia and Arab region. It is time to move from popular culture to high culture.

    Today’s international situation puts more significance on cultural contents than territory marked on a map, which reminds the notion of ‘cultural territory.’ Considering that Korean cultural capacity is globally competitive in spite of being a small country, it makes us attempt management of the state with the cultural territory in mind. More than 7.5 million overseas Korean – I would say it is truly of a ‘world-class’ level. Descendents of Korean occupy important positions in major cities of the world, which symbolizes our national power. Among them are quite a few artists around the world, which attracts our attention. Korean cultural territory explains Korea as a powerful nation in international community. Korean cultural territory is far from small and consequently, it is urgent to make both systematic and practical policies for overseas Koreans at a national level. It should also be considered to actively enforce policies to support artists. We’ve worked for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under the notion of Korean cultural territory in order to claim that policies to manage and support art of Koreans living abroad are more important than projects to bring Western art into the country.

    We have taken a small step forward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It is an event held in a private sector with difficulties but we try to show our will through the project, a cross section of our heart to identify our home within the cultural territory. Our home in modern society would have momentous symbolism and make us ask the question yet again; where is our home.
  • 우리 집은 어디인가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승 보 / 광주시립미술관장

    창원시에서 개최했던 2007창원아시아미술제의 전시명을 《복숭아꽃 살구꽃》으로 한 적이 있다. 이미 기원전 중국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간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고대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친숙한 꽃이다. 창원은 이원수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늘어나는 다문화 이주민들이 어떻게 창원을 새로운 고향으로 여기고 살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역주민 또한 거의 대부분 타지에서 1980년대 이후에야 창원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전시를 통해서 자신이 두고 떠나온 고향과 함께, 낯선 다문화 이주민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길 바랐다. 당시 전시 서문 도입부에 이런 문장을 소개했다. "자신의 고향이 좋은 사람은 여전히 연약한 초보자(어린아이)고, 모든 곳을 다 자기 고향으로 여기는 이는 이미 강한 사람이며, 전 세계를 타향으로 여기는 이는 완전한 사람이다. - 휴고(Hugh of st. Victor, 1096~1141, 중세독일 Saxony의 수도사)"

    글의 원래 뜻은 세상이 ‘나와 비슷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고향이 같다한들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없기야 하겠는가. 타인들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향(타인)을 고향(자신)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강한 자의 마음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것도 쉽지는 않지만, 타향(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어려운 일 아닌가.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타인에게 자신의 영역을 내어주는 사람, 그래서 휴고는 그런 사람을 완전하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 초대하지는 못했지만 차학경(1951~1982)은 지난 1990년대, 미국에서 다문화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조명과 함께 회고전을 가졌다. 작가의 사후에야 큰 관심을 받았던 작품 <받아쓰기(Dictee)>는 트랜스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이민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묘사한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낯선 타향에서 살아간다는 게 이처럼 쉽지가 않다. 소비에트 시절 연해주에서 살던 고려인들은 강제이주(1937년)로 카자흐스탄의 사막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이주 첫날밤, 그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땅굴을 맨손으로 파헤치다시피 해 안식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작가들은 바로 그들의 직계 후손이다. 비록 모국어는 잊었지만 여전히 김치와 된장국의 맛을 이어가는 고려인들을 보면서, 오늘과 어제가 이어지고 또 내일이 연결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미 국가 간의 경계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독일이 통일되고 유럽은 근대적 민족국가를 넘어 EU(유럽연합)라는 새로운 희망을 열어가고 있다. 아직은 말도 많고 삐걱되긴 하지만 근대기를 지배했던 국가의 성격이 변화의 길을 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흐름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가능한 상상을 펼치게 한다.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0만 명을 넘었고 불과 3년 후인 2021년에는 300만 명을 예상한다니,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가 달라지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한국 거주 외국인 통계숫자의 95%는 아시아인이며 그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중국에서 온 동포들이다. 토착화된 중국식당과는 달리 ‘화궈(火鍋)’나 중국식 양꼬치 ‘양로추알(羊肉串儿)’이 국내에 소개되고 대중화된 게 그런 이유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가는 데 한 몫을 한 게 중국에서 온 한민족 동포들인 셈이다. 그렇듯이 중국현대미술 ‘4대 천왕’과 같이 중국 팝아트의 거장들에 익숙했던 우리에게도 다양한 면모의 현대중국미술을 소개할 작가들은 아마 중국의 동포 작가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문화 가정과 다양한 문화의 공존’이라는 지금껏 우리 사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화되고 있다. 다문화를 온전히 수용하기에는 정책과 제도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말에도 ‘마음이 가는데 몸이 따라가는 법’이라고 했다. 마음으로 우러나는 공존과 상생 의식이 없이는 평화가 깃들기는 힘들다. 차별적인 시선과 대우로는 이주민들의 현지인과의 상생을 꿈꾸기는 애초에 어려운 일 아닌가.

    다문화 사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가 용광로 이론이다. 예전에는 미국이나 뉴욕을 멜팅 포트(Melting Pot)라고 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혼합으로 마치 용광로 속에 모든 것을 넣고 끓이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새로운 미국문화가 만들어진다는 이론이다. 또 하나는 샐러드 볼(Salad Bowl) 혹은 모자이크사회(Mosaic society) 이론이다. 모든 이민자들이 가지고 온 다양한 문화가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만, 마치 샐러드를 씹으면 각자 고유의 맛이 살아나면서도 독특한 샐러드의 맛이 있다는 의미다. 점차 이주민들이 늘어나는 한국 사회 또한 다양성의 장점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자이크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존중이란 공존을 의미한다. 희망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지는 것은 7개의 색깔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양성을 부정하고 모든 색채를 통합한다면 검은 색만 존재할 것이고,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색을 부정한다면 흰색만이 존재할 것이다. 흑백논리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번 전시회의 대주제인 ‘평화, 상생, 공존’의 의미가 여기에 있을 듯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했다. 한민족 이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남과 북의 달라진 문화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적 교류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진 현재,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한민족이라는 공통의 분모는 문화예술이라는 감성의 교류로 찾아가는 일이 보다 중요해 졌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동포 예술가들과의 만남과 공감대 형성은 그래서 우리를 ‘하나의 동질성만이 최선’이라는 이념적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

    Where is our home

    Nice to meet you!

    Seungbo Jun / Director, Gwangju Museum of Art

    I once named one of exhibitions at 2007 Changwon Asia Art Festival held in Changwon as 《Peach Blossom Apricot Blossom》. Spreading from China to all over the world even before Christ, both peach blossom and apricot blossom are familiar to everyone from ancient times. It was first because Changwon is hometown of writer Lee Wonsu and because I was thinking of how immigrants from multiple cultures would regard Changwon as their new hometown and settle down in the city. Most of residents had also come from other regions since 1980s. I hoped that they would think about their hometown left behind and strange multi-cultural immigrants once again through the exhibition. I quoted the following sentence in the introduction of exhibition preface; “One who likes his hometown is still a delicate novice (child), another who regards everywhere as his hometown is already a strong man and the other who considers the whole world as a strange place is a perfect man. (Hugh of st. Victor, 1096~1141, German monk in medieval Saxony)”

    The citation was originally for realizing yet again that the world is ‘not to live with people similar to me but to live together with complete others.’ People must have conflicts even though they are from the same town. It is because people unavoidably live with others. Thus, to identify strange places (others) with hometown (oneself) can only be heart of the strong. It is never easy to do but it would be a really hard to acknowledge existence of strange places (others) and accept them as they are. Hugh calls one who generously gives his own domain to others nonidentical to him a complete man.

    Though Cha Hakkyoung (1951~1982) is not invited to this exhibition, she was highlighted yet again and had a retrospective exhibit in 1990s with rising interests in multicultural society in US. The work that was not given much attention until artist’s death describes hardship of immigrants who lost their mother tongue in terms of transnationalism. It is as hard as this to live in a strange place with the language barrier. Goryeoin (Russian Koreans) who lived in Maritime Province in Soviet times was deported (1937) and almost abandoned in a desert in Kazakhstan. On the first night of deportation, they dug underground tunnels with bare hands to make resting place and to survive the cold. Artists participating in this exhibition from Central Asia are their direct descendants. Though they’ve forgotten the mother tongue, we can feel once again that today, yesterday and tomorrow are linked, watching Goryeoin still keeping the tradition of Kimchi and soybean paste soup.

    Perception of national borders has changed a lot from the past. German has been united and Europe is opening up a new hope of EU beyond modern nation state. We all know that features of nation that dominated the modern times, though it is still questionable and controversial, are definitely changing. This flow makes us stretch many different imaginations living today. The number of foreigners staying in the country has exceeded 2 million and it is expected to grow up to 3 million in the coming three years, which suggests change of lifestyle and living culture is no wonder. Currently, Asians take up 95% in statistics of foreigners living in Korea and almost half of them are Chinese Koreans. It is why ‘Chinese shabu shabu (火鍋)’ and skewered lamb, unlike localized Chinese restaurants, have been introduced and popularized in Korea. In other words, it is Chinese Koreans that have played a role to transform Korea into a multicultural society. Likewise, I think Chinese Korean artists would introduce modern Chinese art with diverse aspects to us who have been familiar with masters of Chinese pop art such as ‘four masters’ of Chinese modern art.

    ‘Coexistence of multicultural family and diverse cultures’ that our society has not experienced before is now being actualized. Policy and system need to change in order to completely embrace multiple cultures but not enough. There is an old saying that ‘Where one’s body goes is where his heart lies.’ It is hard for peace to abide without hearty awareness of coexistence and win-win. It would be difficult that immigrants dream of win-win with locals in spite of discriminative cold eyes and treatment in the first place.

    Multicultural society is largely categorized as two types. The first is furnace theory. United States or New York was called melting pot before. The theory is that multiple races and cultures are mixed and interact each other and American culture is newly formed as everything is put into furnace and boiled in it. The other is salad bowl or mosaic society theory. It means that multiple culture brought by every immigrant is put in one bowl but when we chew the salad, we can feel taste of each ingredient distinctly while the salad itself has its own flavor as well. Korean society with increasing immigrants should also seek to be mosaic society in order to enjoy advantages of diversity.

    Respect for diversity means coexistence. Rainbow hanging in the sky is the symbol of hope because it has seven colors all together. When diversity is denied and every color is just put together, there would only be black and if other colors are denied in order to keep one’s own domain, there would be white alone. That is the way of thinking in black and white. The meaning of the main theme of this exhibition ‘peace, win-win and coexistence’ may lie in here.

    ‘Walk in someone's shoes,’ says an old proverb. We should approach cultures changed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through experience of separation. Expectations for reconciliation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and for peaceful exchange have never been this high before and we have a lot of tasks to solve. Nevertheless, it matters the most to look for the common denominator of Korean race through emotional exchange of culture and art. Meetings with overseas Korean artists around the world and building sympathy with them will consequently have us overcome an ideological prejudice that ‘one homogeneity is the best thing ever.’

  • 우리 집은 어디인가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1. 우리 집은 어디인가

    2018년 세계 한민족 미술대축제는 아시아권과 유럽권, 남북미권 등 여러 대륙에 흩어져 살며 작업하고 있는 한민족들의 작업이 한데 모인 축제의 성격을 띠는 미술 전시이다. 한국에서 작업하고 있는 남한 미술가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고, 거리상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70년이 넘는 분단으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 미술가들도 참여하여 ‘한민족’이라는 키워드를 더욱 내실 있고 감격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이번 시즌에 남북한 미술인들의 만남이 여러군데서 열리고 있는데, 예술은 앞으로 이뤄질 상황에 대한 예기(豫期)라는 점에서, 이러한 만남들은 우리 민족에게 긍정적 신호로 다가온다. 예술은 기존의 현실 속에서 미지의 잠재적인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2018년의 축제는 남쪽과 북쪽의 한민족 모두에게 질곡이 되었던 분단체제가 곧 실행되리라고 기대되는 종전선언을 통해 급격히 변화되어가는 즈음에 열리는 것이라 더욱 무게감이 실린다.

    세계평화에 오랫동안 난기류를 형성하고 있던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은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맥락과 긴밀하다. 지구촌 시대에 정치든 문화든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한민족’이라고 호명된 주체들은 느슨한 축제적 집합이면서도 긴급한 현실성을 가진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한민족 역량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정치경제 부문에서의 역할이 있듯이, 미술계에서는 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남과 대화를 추구한다. 대화는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대화를 말한다. 같은 부류끼리의 대화는 무늬만 대화지 독백과 다름없다. 축제의 성격을 띠는 이 전시는 독백의 음울함이 아니라, 타지에서 온 얼굴과 얼굴이 맞대는 대화를 추구하는 장이다. 몸이 직접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술작품이란 작가의 얼굴과 몸에 해당되니 만큼, 세계 한민족 미술대축제는 타자의 얼굴들이 마주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행사의 귀한 손님인 북한 작가들은 오랫동안 타자였다. 북한 미술인과의 만남은 ‘동질성 회복’같은 강제적인 또는 피상적인 화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사)한민족미술교류협회가 수년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던 가치는 ‘평화, 상생, 공존’이었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지구촌 시대에 더욱 가까워진 세계인들에게는 그만큼 이질성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는데, 이때 경쟁이 아닌 상생, 유아독존이 아닌 공존은 평화의 조건이다. 평화는 ‘세계는 하나’라는 피상적인 구호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대화는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문화와 예술은 식물과 비교하자면 꽃에 해당된다. 정치가 씨를 뿌리고 경제가 성장시킨다면, 문화는 그 결과의 만개이다. 물론 그 꽃이 만들어낸 열매와 씨는 그다음의 순환주기에 돌입할 것이다.

    예술이 꽃과 비유될 때, 그것은 장식이나 잉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작을 알리는 기능을 가진다. 같은 씨앗도 다른 토양과 기후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서 펼치는 장은 그러한 형질 변환을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차이는 소통의 조건이고, 성공적 소통은 차이에서 긍정적인 면을 추출하니 만큼, 대규모 문화교류의 장은 생산적 기능을 할 수 있다. ‘평화, 상생, 공존’이라는 기조 아래, 올해의 전시주제는 ‘우리 집은 어디인가’이다. 분단은 물론 세계각지에 흩어진 미술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을 떠나는 여정에 진입했고, 늘 상 자신이 비롯된 곳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왔다. 거기에는 조국, 고향, 집에 대한 이상적 상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 집’은 누군가한테는 실제적인 장소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이 근본적인 가치는 다른 모든 가치와 더불어 불확실해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가치들이 허구나 허위의식은 아니다. 이상은 관념을 넘어서 현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 또한 작가에게는 엄연히 자신이 직면한 현실이다. 집은 또한 몸이다. 우리 집이 어디인가를 묻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함께 참여한 다른 전시기획 위원들과 분담하여 평문을 쓰기로 했지만, 국내 120여명, 해외 60여명, 북한 20여명 등, 전체 2백여 명이 넘는 작가의 작품 경향을 일일이 분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렵고, 독자들에게 장황함을 줄 것 같아서 필자의 평문은 크게 ‘최초의 중심’, ‘중심의 상실’, 그리고 ‘다시 중심을 찾으려는 경향’이라는 이론적 서사를 기조로 할 것이다. 최초의 중심이란 있었던 또는 있었을지 모를 최초의 집이다. 그러나 그러한 최초의 집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집은 몸과 비교되지만, 그 단계는 자궁 속에서 바깥의 모든 불쾌한 자극으로부터 보호되면서 필요한 모든 에너지가 공급되었던 원초적 시공간이기도 하다.

    현대, 세계화라는 격동은 최초의 중심을 거의 신화의 시대로 소급하게 한다. 최초의 중심은 집단적 신화일 수도 있고, 집단의 신화가 차원을 달리하여 반복된다는 점에서 개인의 신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심은 상실되었고, 그것을 되찾으려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여정은 원래의 중심뿐 아니라 새로운 중심으로의 이동 또한 포함된다. 이러한 여정은 유목이나 산종(散種)이라는 우리 시대 문화의 키워드와 관련된다. 현대는 늘 상 과도기로 규정되곤 하였기에 떠남은 상시적이다. 떠남은 물리적 이동 뿐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상상적 떠남 또한 포함된다. 예술은 이러한 여정의 궤적이고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또 다른 정착이 매번 시작된다. 최초의 집은 아니지만, 새롭게 머물게 된 그곳들에 대안의 집이 구축된다. 세계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그곳의 풍토와 상호작용한 문화적 결과물에서 우리는 대안의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상실된 중심을 되찾으려는 이들의 여정에서 새로운 중심이 생겨났다. 그러한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우리 집’은 그 경계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2. 우리 집(中心)의 상징

    우리 집의 원형은 고향 집이다. 누군가에게는 제주도, 누군가에게는 함경도에 있었을 그 집 말이다. 그들에게 고향 집은 현재의 변화된 상황과 무관하게 변치 않은 시공 속에 존재하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회귀하는 원형으로 작동한다. 철학자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이란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라고 하면서,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집을 인간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 즉 그것은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이기에, 그것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자체가 소우주인 예술작품에는 소우주로서의 집과 몸에 대한 비유가 압축되곤 한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도 [상징, 신성, 예술]에서 우주-인간의 동형론을 주장하면서, 질서화된 영역과 인간 거주지는 우주와 신적 거주지에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와 집(또는 사원), 그리고 인간의 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동일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통로가 열려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주-집-인간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은 지금까지도 현존하는 인도의 철학적 사유를 낳았고, 서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그 관념이 계속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그토록 중요한 집은 최초의 출발이 된다. 설사 실제의 고향 집이 존재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낙원이 아니더라도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기대치가 있으며, 이후의 고난에 찬 여로는 실제 고향 집의 흠결마저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게 한다. 알에서 깨어나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인간은 실존주의자들이 즐겨 묘사했듯이 ‘세계에 내던져’진다. 대도시를 포함하여 낯선 곳이라 함은 집과 반대편에 놓이는 장소로 소외감을 준다. 이때 소외된 자는 ‘집을 에워싸서 공격하는 힘을 적대하여 싸우는 집의 보호적 가치’(바슐라르)를 꿈꾼다. 집은 그다지 우호적이라 할 수 없는 바깥에 대항하여 은신 가능한 완벽한 처소에 대한 이상의 집적체가 된다. 특히 도시로의 집중이 일어난 근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향 집을 떠났다. 근대적 경쟁의 또 다른 모습인 제국주의 전쟁 또한 자신이 비롯된 곳으로부터의 떠남을 야기했다.

    근대적 세계관을 담은 미술에서, 기계 같은 집 같지 않은 집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대중의 모습을 자주 발견된다. 고향 집과 같은 따스한 집을 다시 일구기 위해서 요구되는 심신의 에너지는 너무나 크게 다가오며, 예술작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이 투사되는 장이 되곤 한다. ‘우리 집은 어디인가’라는 주제는 어쩌면 예술로 밖에 찾아질 수 없는 원초적 시공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을 말한다. [공간의 시학]은 ‘어린이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그의 행복을 그 속에 보호하고 싶어 하는 가장 은밀한 꿈을 보여 달라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한편 모성적 공간을 떠올리는 집에 대한 상상은 성(性)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남성에게 집은 사적 공간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여성에게는 또 다른 일터, 즉 공적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집은 기대치와 실제가 맞부딪치는 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집이라는 가장 친밀한 공간에서 기괴함(unheimlich, uncanny)을 발견하기도 했다.

    ‘은자의 오두막’ 등을 상찬하는 바슐라르의 논의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고풍스럽기까지 하지만, 거의 신성하게 다가오기까지 하는 집이라는 상징적 중심은 신화의 반복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 공간을 변화시키고 특수화함으로서, 요컨대 주변의 세속적 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이 공간을 축성했던 원초의 성현을 반복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성벽은 군사적 보루가 되기에 앞서서 주술적 방어물이다. 그것은 악마와 원령이 우글거리는 카오스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조직화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주화 된’, 즉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일체의 축성된 공간은 중심이다. 집 또한 그러한 모델에 따라 지어진다. 새로 짓는 모든 집은 세계의 재건인 것이다. 엘리아데는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적이기 위해서 새로운 주거나 새로운 도시는 건조의 의례에 의해서 우주의 중심이 투영돼야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새 도시의 건설은 세계 창조의 반복이며, 우주의 복제이다. 도시가 항상 세계상이듯이 집은 소우주이다. 모든 집은 중심으로 변화한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과정에서 낙원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발견한다. 그가 말하는 낙원에의 향수는 항상,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싶은 바람, 요컨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여 신의 조건을 회복하려는 바람이다. 집에 대한 기대나 그리움이 낙원에 대한 향수와 연결될 때, 예술작품은 그러한 향수를 담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신화의 시대가 지나고 초월은 내재적인 것으로 변화했다. 전통사회에서 중심의 상징은 사원 등 종교적 건물에 관철되었다. 사원은 성스러운 공간이다. 엘리아데는 [상징, 신성, 예술]에서 주변을 둘러싼 우주적 환경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역인 성스러운 공간은 세속의 공간과는 구분되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서 선택된 지역이라고 말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聖)의 공간은 항상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속(俗)의 공간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서 무질서하다고 말한 것은 속의 공간이란 유기체적으로 구조지워져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이다. 성의 공간은 명확한 한계를 가지며 완벽하게 구조지워져 있다. 즉 그것은 중심에 자리 잡은 성화 된 공간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스러운 공간은 저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열려짐을 표상한다. 성스러운 장소란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의 교통이 가능한 공간이다. 즉 사원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르는 통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다. 엘리아데의 학설은 종교적 건축에 깔린 사상을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우리의 집이 신성한 것은 보다 큰 집의 상징적 질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적 의미의 집을 그린다는 것은 우주창생을 반복하는 행위와 비교될 수 있다.

    3. 잃어버린 중심을 찾아서

    이상적 집에 대한 상상이 투사되는 예술작품에는 혼란을 질서로 전이하려는 희망이 담겨있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과정을 ‘우주화’라고 묘사한다. 제의적으로 구축된 성스러운 공간, 즉 성소는 우주의 복사판으로서 하나의 세계상이 된다. 고향 집에 대한 이상이 깔려 있는 예술작품에는 그것이 구체적인 집의 재현이나 묘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대우주의 질서를 반향하는 소우주로서의 위상이 존재한다. 존재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원하는 기능주의 시대에, 예술은 분열과 파편화를 딛고 자신이 구축하는 또 다른 현실 속에 전체를 담고자 한다. 이때 중심의 상징이 투사된 집의 이미지는 치유와 비전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正)의 상태는 곧 반(反)의 상태를 끌어들인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에서 엘리아데의 가설을 반박한다. 그에 의하면 엘리아데가 가정하는 중심의 상징체계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 중심은 주변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의 상징을 해체하기 위해 건축된 성소가 없는 유목민의 예를 든다.

    유목민에게는 성스러운 건축 대신에 성스러운 지형적 특징들이 있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이라는 언어가 우선적으로 정치적인 것이고 이차적으로만 우주론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중심은 기본적으로 왕권과 왕의 기능이라는 고대 이데올로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 유형을 보편적인(또는 지배적인) 상징화 유형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중심과의 연결보다는 중심과의 분리가 더욱 보편적이다. 분리가 더욱 가속도를 붙이던 근대 이후 ‘중심의 상실’(제들 마이어)이라는 주제는 모든 문명비판서의 중심 논제가 되다시피 했다. 분리에 방점이 찍힐 때, 우주론보다는 인간론이 전면에 부각된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으로부터의 분리가 반드시 불화, 타락, 비존재라는 카오스로의 침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났지만 변신의 과정을 통해 타자--사물, 사람, 혹은 표지--안에 자리잡음으로서 영속성을 성취하며, 그는 영원히 접근 가능하도록 남아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신화적 중심의 상징은 신전 같은 웅장한 건축과 잘 어울리지만, 이제 중심은 그러한 웅장한 장소에서 극화(재현) 되지 않는다. 중심의 재현을 대체하는 것은 이제 회상이다. 이러한 논지는 공간적 중심이라는 전통적 사고에 깔린 공간적 비유를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시간적 비유로 바꾼다.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현대적 논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와 짝을 이룬다. 상실이나 결핍은 전통을 벗어나는 모든 과도기 사회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방점의 이동에서 거대한 상징적 공간을 건설(making)하는 문제보다는, 잃어버린 상징을 기억하기 위한 표시(marking)가 더 중요해진다. 조너선 스미스는 그것을 건축물의 언어가 아니라, 경로, 길, 자취, 표시 그리고 발자국의 언어에서 찾는다. 중심은 계획적 건설이 아니라, 여행의 우연한 부산물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명확한 중심이 아니라 흔적이다. 흔적은 기억을 일으키고 기억 속에서 영속화될 수 있다. [자리잡기]의 저자는 현상학자나 종교사가들의 글에 등장해서 익숙한 명사적인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담고자 했다고 밝힌다.

    공간/자리의 구별은 친숙함을 기준으로 한다. 친숙해진 공간이 바로 자리인 것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인문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의 말을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자리보다 추상적이다. 미분화된 공간으로 시작된 것이,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가치를 부여함에 따라 자리가 된다...만약 우리가 공간을 운동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리는 휴지를 허락하는 것이다. 운동 중의 각각의 휴지는 위치를 자리로 변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이푸 투안) 조너선 스미스에 의하면 공간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기억들이 불러내지는 데 사용되는 이미지들이 자리할 빈 장소들로 나누어져 있다고 인식된다. 즉 장소는 선재 하며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만약 공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만약 자리가 수동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이식의 능동적 산물이라면?

    고향자리(home place)에 대한 성찰로부터 끌어낸 [자리잡기]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신화적인 중심 대신에 우리의 몸과 경험을 부각시킨다. 즉 공간 내에서 우리에게 방위를 설정해주고 자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즉 인간이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결론이 추출된다. 요컨대 중심의 상징을 재현하는 문제보다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하학적 공간에서 구체적인 자리로의 이동은 고향 또한 내가 태어난 자리나 내가 살던 자리보다는, 기억이 머무는(housed) 곳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이 머무르는 곳이 또 다른 우리 집이 되며 내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 집은 어디인가’에 대한 답은 추상적으로 주어진 공간을 구체적인 자리로 만들려는 모든 행위들에서 찾아진다. 지각과 기억에 바탕 하는 자리잡기는 하나의 중심에서 수많은 중심으로, 또는 그 흔적으로 변해가는 우리 집에 대한 심상지도(mental map)를 만들어낼 것이다. 2018 세계한민족미술대축제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를 위한 가장 유력한 행위가 바로 예술임을 알려주고 있다.

    Where is our home

    Journey to find the lost center

    Sunyoung Lee / Art critic

    1. Where is my home

    2018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is a festive art exhibition where works created by Korean artists living in different continents of Asia, Europe and Americas gather around. Artists in South Korea participate in the festival the most and ones in North Korea who are closest in distance but feel far away due to division for more than 70 years also join this exhibition, which makes the keyword ‘Korean race’ more genuine and touching. Artists both in South and North Korea have several chances to meet each other this season and considering that art serves as expectations for days to come, these gatherings among artists are a positive signal to our people. It is art that reveals the unknown potential in the existing reality. The 2018 festival has more significance as it is to be held at a rapidly changing juncture with expectation that division of territory which has been fetters of both South and North Koreans will soon be changed through declaration of the end of war anticipated before long.

    To overcom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at has long been the turbulence to world peace is an issue not only of South and North Korea but closely related to the context of world history. We need to think of politics and culture in connection with the world in this global era. Thus, ones named ‘world Korean race’ are loose, festive gathering while having urgent reality as well. Overcoming the divided system depends on capacity of Korean people that can interact with the world. As politics and economic sectors have their own role, the world of art pursues gatherings and talks with artists at the center. Talks here, above all things, refer to talks with others. Talk with the same kind is conversation only superficially but actually is a monologue. This festive exhibition is a forum that seeks face-to-face conversation among ones from strange lands, not gloominess of monologue. Even though they cannot meet each other in person, a work of art is an artist’s body and consequently,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is the very forum where strange people come face to face.

    Artists from North Korea, the valuable guest to this event, have particularly been others for long time. Meeting with North Korean artists should go beyond the compulsory or superficial ideology of reconciliation such as ‘recovering homogeneity.’ It is values of ‘peace, win-win and coexistence’ that Korean People Art Sharing Association has continuously pursued for years. It is to turn each others’ difference into the positive, not negative. As cosmopolitans coming close to global era experience more conflicts with heterogeneity, the notions of win-win and coexistence instead of competition and self-conceit are conditions for peace. Peace requires attitude to accept each other’s differences and to talk to each other based on understanding, not a shallow slogan of ‘the world is one.’ Anyone can talk about anything but to liken culture and art to a plant, they are a flower. Politics sow and economy raises. Then the culture is full bloom of the result. Fruits and seeds from that flower will naturally come into the next cycle.

    When art is likened to flower, it does not mean that it is decorative or useless but it works as an indicator for the beginning of future. Seeds with the same background can be transformed in different soils and climates. This forum with works of Korean artists dispersed around the world would be a chance to witness such transformation. Given that differences are criteria for communication and successful communication extracts positive aspects from differences, big-scale forum of cultural exchange can fulfill productive functions. With the keynote of ‘peace, win-win and coexistence,’ this year’s exhibition is of theme ‘where is my home.’ Artists separated in South and North Korea and scattered around the world would have left their home half-willingly and half not and they have always missed the place where they originated. The ideal of their homeland, hometown and home is implicit in it. ‘Our home’ could be an actual place to someone. The problem is, however, that these fundamental values of ‘our’ and ‘home’ have become uncertain along with all other values.

    These values, nevertheless, are not fiction or false consciousness. It is because ideal touches reality beyond idea. A work of art is undoubtedly the reality that an artist faces. Home is also a body. Asking where my home is also a question to one’s identity. Reviews were supposed to be written with other exhibition committee members but it would be physically hard to analyze and describe more than 200 artists’ works – 120 in South Korea, 60 in foreign countries and 20 in North Korea - one by one and also be lengthy for readers. So, my review would be largely based on theoretical description of ‘the first center,’ ‘loss of center,’ and ‘inclination to find the center yet again.’ The first center refers to the first home that used to be or might have been somewhere. However, very few would completely exist in that first home. Though home is compared to body, that phase is also primal space-time when one is in womb, protected from any external, unpleasant stimulations and provided with all energy needed.

    Turbulences of modern times and globalization make the first center retroactive almost to era of myths. The first center may be a group’s myth or that of an individual in that the group’s myth repeats in a different dimension. Suddenly, however, the center was lost and journey to get it back started. The journey not only includes the original center but movement to a new center. This journey is associated with our time’s cultural keywords of nomadism and dispersion. As modern times have always been defined as transition period, leaving takes place at all times. Leaving includes not only physical movement but imaginary leaving from one’s own place. Art is the trace of such journey and the result as well. New settlement starts this way all the time. Though it is not the very first home, alternatives are built in a new settlement. We can find alternative places from cultural output made through interaction with natural features of places where they’ve settled. Journey of people who try to get back to the lost center makes a new center. There would be multiple of that center, not one. ‘Our home’ would expand its border on that journey.

    2. Symbol of our home (中心)

    Prototype of our home is the home in hometown; house in Jeju island to someone or in Hamkyong Province to another. Their hometown exists in time and space unchanged even with changing circumstances and works as the prototype to get back both consciously and unconsciously. According to [Poetics of Space] by philosopher Bachelard, ‘home is our very first world’ and ‘home is one of the greatest powers to integrate one’s ideas, memories and dreams.’ Bachelard equates home with human being itself. In other words, ‘home is body, soul and the very first world of a human being’ so without it, ‘human being would fall asunder.’ A work of art, a microcosm itself, is compressed analogy of home and body as a microcosm. Religion scholar Eliade also claimed a theory that universe and human are the same in [Symbol, Divinity and Art]; as domain put in order and human dwellings correspond to universe and divine residence, universe and home (or temple) and human body are of invisible identification and the path among them is open.

    Thus, he points out that oneness existing among universe, home and human body brought Indian philosophical thoughts that last till now and that idea remained until Renaissance in the West. Home with such significance is the very first start. Though one’s actual house in hometown is not a paradise that perfectly protects his existence, it is expected to be that way and subsequent painful journey even makes flaws of home feel missed. With inevitable pain to hatch out, humans are ‘thrown to the world’ as a favorite description of existentialists. Strange place including big cities located at the opposite of home gives us a feeling of alienation. That alienated individual dreams of ‘protective value of home fighting against power surrounding home’ (Bachelard). Struggling against unfavorable outside, home becomes the complete ideal for perfect place to hide oneself from unfavorable outside. Many people have left their hometown particularly in modern times with urban concentration. Imperialist war, another form of modern competition, also incurred leaving from place where one originates.

    Art that implies a modern view of the world frequently shows loneliness of the general public living in a machine-like, unhomely house. It feels that energy to build a home as warm as one in hometown would be tremendous both physically and mentally and a work of art becomes a forum where ideal that cannot be realized in reality is projected. The theme of ‘where is our home’ speaks of continuous search for primal time and place that could only be sought by art. [Poetics of Space] describes that ‘Asking a child to draw a house is like asking him to show his most secret dream in which his happiness is wished to be protected.’ Imagination of home that recalls recalling maternal space, on the other hand, may vary depending on one’s sex. Home was private space to men but for a long time, it was another workplace for women, in other words, more of public space as well. Home is also where actuality clashes with expectations. Thus, Freud would find unheimlich (uncanniness) in the most familiar space of home.

    Bachelard’s discussion that praised works like ‘Hermit's Cabin’ seems even moss-grown in terms of 21st-century discussion but the symbolic center of home that feels almost sacred is repetition of myth. [Introduction to History of Religion] by religion scholar Eliade states that the notion of divine space repeats primal saints who built such space by changing and specializing this space, in short, separating it from surrounding worldly space. According to Eliade, rampart is an occult shield ahead of military bastion. It is organized in the middle of chaotic space infested with evils and revengeful spirits. It secures ‘cosmological’ space that way, in other words, space or domain equipped with center. Eliade argues that whole space built is center. House is also built in accordance with such model. Every newly built house is reconstruction of the world. Eliade tells that new residence or city should be projection of center of the universe for sustainability and practicality by formality of construction.

    Likewise, construction of a new city is repetition of world creation and reproduction of universe. As a city is always a picture of the world, a house is microcosm. Every home changes into center. In this process, Eliade discovers nostalgia to paradise. His notion of nostalgia to paradise is a hope to be located at the center of world’s actuality and divinity all the time at ease, in short, a hope to restore God’s conditions with a natural manner beyond human conditions. When expectations or longing for home is connected with nostalgia to paradise, a work of art can be a medium to express that nostalgia. After the era of myth passed, transcendence has changed into something inherent. Symbols of center in the traditional society were realized at religious buildings such as temple. A temple is sacred space. In [Symbol, Divinity and Art], Eliade says that sacred space which is qualitatively different from surrounding cosmic environment is distinct from worldly space but still an area selected within.

    According to Eliade, space of sanctity is always surrounded by enormous, disordered and hardly known secular space. The notion of disorder here means that secular space is not structured organically. Space of sanctity has definite limitation and is perfectly structured. It is, in other words, sacred space located at the center. Eliade also states that sacred space is being open to transcendental existence out there. Sacred place is space where this world and the next one can communicate. That is, sacred space called temple enables path to reach from one side to the other side. Eliade’s theory well explains ideas that underlie religious construction. Why our home is sacred is that it repeats a symbolic order of bigger home. Drawing home of ideal meaning, therefore, can be compared to an act of repeating the universe and the people.

    3. To find the lost center

    A work of art to which imagination to ideal home is projected contains a hope to transform chaos into order, which Eliade describes as ‘cosmologicalization.’ Ritualistically constructed sacred space, in other words, a sanctum, is duplication of universe and becomes a picture of the world. A work of art with underlying ideals for the house in hometown has its status as microcosm that echoes order of macrocosm even when it is not reproduction or description of a specific house. In the era of functionalism that only demands a part of existence, not its whole, art is to overcome division and fragmentation and to express the whole in another reality that it constructs itself. Home image here to which symbol of center is projected can play a role of healing and vision. This rightness, however, soon involves the reverse. In [To Take Place], Jonathan Smith refutes Eliade’s hypothesis. According to Smith, symbolic system of the center that Eliade assumes can work as an ideology. It is because the center would dominate the surroundings. To break up the symbol of center, Jonathan Smith takes an example of nomad who does not have constructed sanctum.

    Nomads have sacred geographic features instead of divine construction. Jonathan Smith points out that the language of center is political first and it is cosmic only secondarily. The basic notion of center originated from ancient ideology of sovereign power and functions of king. Jonathan Smith’s view is that the center type should not be taken as universal (or dominant) symbolization type. He argues that separation from the center is more universal than connection with it. After modern times when separation speeds up, the theme of ‘loss of center’ (Sedlmayr) seems to have always been a central subject of every civilization criticism. When separation is stressed, anthropology is highlighted over cosmology. Jonathan Smith tells us that separation from the center does not necessarily mean disharmony, degeneration or sinking to chaos of nonexistence. Though human gets out of its own place, they achieve permanence and remain accessible for ever by locating themselves in others – object, people or sign - through process of transformation.

    Symbol of religious and mythical center suits magnificent structure like temple but the center is not dramatized (reproduced) at such a grand place. What substitutes reproduction of the center is now retrospection. This thesis changes spatial analogy that underlies traditional thinking of spatial center into temporal analogy to search for the center. A modern issue of finding the lost center pairs off with ‘In Search of Lost Time’(Proust). Loss or deficiency has become a constant, not a variable in every transition period escaping from tradition. On this shift of emphasis, marking to remember lost symbols has more significance than making huge symbolic space. Jonathan Smith finds it from language of path, road, trace, mark and footprint, not from that of building. Center can emerge from accidental by-product on journey, not from planned construction. That is not a definite center but a trace. Trace recalls memories and it can perpetuate in memory. Author of [To Take Place] appears in articles by phenomenologists or historians of religion and clarifies that he wanted to express social and verbal understanding on place rather than familiar and nominal sacred space.

    Space and place are distinguished depending on familiarity. Familiar space becomes a place. Jonathan Smith quotes human geographer Yi-Fu Tuan. According to his argument, ‘Space is more abstract than place. Starting from undifferentiated space, it becomes a place as we get more familiar with that place and give values on it... If we think of space as allowing motion, place is of allowing pause. Each pause during motion enables location to turn into place.’ (Yi-Fu Tuan) According to Jonathan Smith, space is recognized as what has already existed and divided into empty places in which images used to recall memories are to be located. In other words, place is thought to priorly exist and to remain longer than memories. But what if space is not given but created by human’s projection? What if place is not a passive container but an active product of implantation? 

    [To Take Place] drawn from introspection on home place tries to find answer to these questions and highlights our body and experience instead of mythical center. In other words, we can draw conclusion of setting directions for us within space and giving significance to place, that is, humans make place exist, not humans are located. In short, taking a place is more important than reproducing symbol of center. Movement from geometric space to specific place signifies that hometown can be better understood as a place where memories are housed than place where I was born or I used to live. Where our memories are housed becomes another home of ours and myself. Answer to ‘where is our home’ is found from every act that tries to make abstractly given space a specific place. Taking a place based on perception and memory would make a mental map of our home that is changing from one single center to multiple centers or turning into that trace. It is works submitted to 2018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that tell us art is the most powerful act for it.
  • 우리 집은 어디인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흐름

    경기문화재단 이경일

    Ⅰ. 서론

    ‘흩어진 사람들’, 본토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떠나게 된 사람들을 뜻하는 디아스포라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로 인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유대인 집단에서 기원하였다. 디아스포라는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어 유대인뿐만 아니라 국외로 추방된 공동체나 난민, 소수 인종, 정치적 망명, 이주노동자 등과 같이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칭하며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말로는 민족이산 또는 분산이라 할 수 있겠다.

    디아스포라라는 용어가 포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학계에서는 디아스포라가 가지는 의미와 특성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윌리엄 사프란은 디아스포라를 ‘국외로 추방된 소수 집단의 공동체’라고 정의하였고, 아래와 같은 여섯 가지의 조건을 제시하며 이주공동체와 구분 지었다. 윤인진. 2003. “코리안 디아스포라-재외한인의 이주, 적응, 정체성”, 『한국사회학』 37(4). pp.102~103.


    <표1> 디아스포라의 정의와 특징
    윌리엄 사프란 로빈 코헨
    정의 국외로 추방된 소수 집단 공동체 피해자, 노동, 통상, 제국, 문화 디아스포라
    조건 1. 특정한 기원지로부터 외국의 주변적인 장소로의 이동
    2. 현재 거주 사회로부터의 소외
    3. 모국에 대한 집합적인 기억과 신화 보유
    4. 모국을 결국 돌아가야 할 진정한 자신들의 집이라고 보는 견해
    5. 모국의 회복과 유지에 대한 헌신
    6. 정체성이 형성된 모국에 직간접적으로 지속적인 관계 유지
    ※ 사프란의 6가지 조건에 3가지 조건이 더해짐
    7. 노동, 통상, 식민지 개척을 위해 모국으로부터의 인구확장
    8. 타국의 동족과의 감정이입과 연대감
    9. 다문화주의를 허용하는 거주국 사회에서 고유하고 창조적이며 풍성한 생활의 가능성
    로빈 코헨은 디아스포라를 피해자, 노동, 통상, 제국, 문화로 유형화하였으며, 사프란의 조건에 세 가지의 조건을 추가해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더욱 확장하였다. 결국 기존 연구에 있어 디아스포라는 모국으로부터의 분산과 이주, 모국의 문화와 정체성의 유지 및 연대 등으로 크게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내의 한인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는 중국이나 소련 거주 한인에 관한 접근이 어려웠던 냉전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88년도에는 10여개 국가의 한인 학자 및 국내 학자가 활동하는 재외한인학회가 창립하여 올해 30주년을 맞이하였고, 해마다 3회씩 재외한인연구 저널을 출간하고 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1992년 한·중 수교는 이들의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해주었다. 재외한인연구에 있어 윤인진 교수(고려대 사회학과)의 성과는 매우 두드러지는데, 2004년 발표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려대 출판부)에서 그는 중국, 일본은 물론 미주, 캐나다 등 세계의 주요 한인 이주 지역의 현지 설문조사를 통해 지역 한인들의 상황을 포괄적으로 담아내었다. 국가 차원에서도 성과물이 나타나고 있다. 외교부에서는 외국에 거주하는 재외동포의 현황을 격년별로 파악하여 발간하고 있다. 비록 주재국의 인구 관련 통계자료, 한인 단체들의 조사자료, 직접조사 등을 근거로 산출한 추정치로 정확도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으나, 재외동포에 관한 연구, 정책 수립,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의 기초자료로 크게 활용되고 있으며, 1997년에는 재외동포재단이 설립되어 재외동포 연구 지원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표 2> 재외동포현황 총계(2011~2017) ※ 출처 : 외교부 재외동포현황 2017
    2011 2013 2015 2017 백분율(%) 전년비 증감율(%)
    총계 7,175,654 7,012,917 7,184,872 7,430,688 100 3.42
    동북아시아 일본 913,097 893,129 855,725 818,626 11.02 -4.34
    중국 2,704,994 2,573,928 2,585,993 2,548,030 34.29 -1.47
    소계 3,618,091 3,467,057 3,441,718 3,366,656 45.31 -2.18
    남아시아태평양 453,420 485,836 510,633 577,791 7.51 9.24
    북미 미국 2,075,590 2,091,432 2,238,989 2,492,252 33.54 11.31
    캐나다 231,492 250,993 224,054 240,942 3.24 7.54
    소계 2,307,082 2,297,425 2,463,043 2,733,194 36.78 10.97
    중남미 112,980 111,156 105,243 106,794 1.44 1.47
    유럽 656,707 615,847 627,089 630,693 8.49 0.57
    아프리카 11.072 10,548 11,583 10,853 0.15 -6.30
    중동 16,302 25,048 25,563 24,707 0.33 -3.35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1996년부터 우리 민족의 정체성 이해를 위해 중국, 우즈베키스탄, 일본, 미국 등의 지역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해왔으며, 2016년에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지역의 고려인을 조사하여 『재외 한인 동포 생활문화 현지조사보고서 : 고려인의 목소리』를 발간하였다. 이주 1세대부터 4세대에 이르기까지의 고려인의 생활풍습을 구술, 사진 등으로 엮어 소중한 기록 자료를 남겨두었다. 같은 해 국가기록원은 광복 7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록으로 보는 재외한인의 역사 : 이주와 정착 그리고 발전의 시간들』 아시아, 아메리카, 유라시아·유럽편 총 3권의 방대한 양의 사진, 문서, 편지, 기사 등을 수록하여 출간하였다. 국내외 기관 및 개인으로부터 수집한 한인 이주 관련 자료 총 1,056점이 실린 이 책에서는 1860년대부터 시작된 한인이주 약 150여 년의 역사를 시대별, 지역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 글은 세계한민족미술대축제의 시작에 앞서 재외한인들의 이주사를 간략하게 훑어봄으로써 미약하게나마 이번 축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목적이 있으며, 국가기록원의 『기록으로 보는 재외한인의 역사 : 이주와 정착 그리고 발전의 시간들』 아시아, 아메리카, 유라시아·유럽편을 바탕으로 요약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Ⅱ. 본론

    <표3> 지역별 재외한인 비교표 ※ 국가기록원 재외한인의 역사(재외 한인의 시대별 변천)
    중국 일본 독립국가연합 미국 중남미
    1단계 1863-1910 1910 이전 1863-1904 1903-1905 1905-1921
    2단계 1911-1930 1910-1937 1905-1937 1906-1945 1922-1956
    3단계 1931-1945 1938-1945 1938-1945 1946-1964 1963-1971
    4단계 1946-1992 1946-1989 1946-1991 1965년 이후 1972-1980
    5단계 1992년 이후 1989년 이후 1991년 이후 1980년 이후
    세대구성 2,3세가 주류 2,3세가 주류 3,4세가 주류 1세가 주류 1세가 주류
    출신지역 1930년 이전 : 현재의 북한지역(함경도, 평안도) 1930년 이후 : 한반도내 지역으로 다양화 현재의 남한지역(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현재의 북한지역(함경도, 평안도) 대부분 남한출신과 소수의 북한 실향민 1921년 이전 : 서울, 인천
    1963년 이후 : 대부분 남한 출신과 소수의 북한 실향민
    이주동기 주로 경제적 이유(경제유민) 정치적 동기(독립운동)도 작용 주로 경제적 이유(노동이민) 1937-1945년에는 강제징집 주로 경제적 이유(경제유민) 정치적 동기(독립운동) 작용 주로 경제적 이유(초기의 노동이민과 후기의 중산층 이민)
    사회문화적 이유(자녀교육)도 작용
    주로 경제적 이주(초기의 노동이민과 후기의 농업이민, 투자이민)
    북미로 재이주하기 위한 경유지
    계층배경 다수가 기근과 압제에 떠밀린 농민유민의 성격이 강했음 다수가 농민과 노동자 체류자와 강제이주자의 성격이 강했음 다수가 기근과 압제에 떠밀린 가난한 농민유민의 성격이 강했음 초기 : 농민, 노동자
    중기 : 국제결혼 여성, 전쟁고아, 유학생
    후기 : 고학력, 중산층
    ※ 초기에는 체류자 성격이 강했으나 이후 정착이민의 성격이 강함
    초기 : 군인, 농민, 노동자
    중기 : 고학력, 중산층 ※초기에는 체류자 성격이 강했으나 이후 정착이민의 성격이 강함
    거주국의 민족정책 다원주의
    (민족자치 허용)
    동화주의 동화주의 다원주의 다원주의
    문화변용수준 민족문화 유지 일본문화로의 동화 러시아문화로의 동화 미국문화로의 동화와 민족문화 유지 초기 이민자 후손은 현지문화 동화
    후기 이민자는 한인정체성과 민족문화 유지

    1. 중국

    우리나라 전체 재외동포는 <표2> 재외동포현황 총계와 같이 2017년 기준 740만 명에 달한다. 이중 약 1/3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 중국으로의 비자발적인 이주는 1636년 병자호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금의 태종은 청나라를 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인조의 두 왕자와 약 60만 명의 우리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들은 전장으로 나가거나 노예가 되었고, 극히 일부만이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며 중국으로의 이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9세기 조선의 가뭄과 기근, 민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의한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고가 심해지자 경제유민으로서 농업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 1860년 10월 베이징에서 청나라와 러시아는 연해주 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내주게 되는 조약을 맺게 되고,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침략 야욕을 원천봉쇄하고 실효적 지배의 강화를 위해 청나라는 만주 일대의 개간을 장려하며, 조선인의 이주를 묵인하였다. 1883년에 이르러서 합법적 이민을 허용하였다.

    초기 생활고 해결을 위한 이주는 1909년 간도협약과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정치적인 목적도 함께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압제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이주하였고 만주와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 간도지역의 한인은 46만 명에 달하였고 독립운동기지 건설, 대한독립군 등을 조직하며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지역의 실질적인 지배가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제는 만주지역 개발을 목적으로 집단적인 강제 이주를 실시했다. 1931년 만주에 거주하던 한인의 수가 약 64만 명이었으나 당시 일제의 집단이민정책으로 인해 1940년에 이르러 만주의 한인 수는 145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재중동포사회에서도 한인들은 민족교육 및 항일 투쟁을 수행했다.

    1945년 드디어 일제가 패망하고 중국에서는 국·공 내전의 발생으로 한인들 중 일부(약 6만5천명)가 공산당을 위해 전장에 함께하였다. 1952년 한인들은 중국인과 함께한 항일투쟁과 해방투쟁의 희생을 인정받아 소수민족으로서 길림성 내 연변 조선족자치주 성립을 허용 받고, 중국 공식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규정되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우리나라 기업의 중국 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많은 한국인들이 새롭게 중국 전역으로 진출하고 있으며, 해방 이전 한국을 떠났던 중국 동포 80만 명이 다시 한국에서 거주하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2. 일본

    1884년 갑신정변 전후로 이미 조선인 거주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일본으로의 본격적인 이주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고, 토지조사국에 신고 되지 않은 사유지는 모두 총독부에 몰수당했다. 이로 인해 경작지를 잃은 농민들은 임금이 더 높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반면 미미하지만 지식인들의 유학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서는 4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탄광, 건설, 방직, 벌목 등의 단순노동에 종사하였고 주로 규슈나 홋카이도, 오사카나 후쿠오카 등에 거주하였다. 지속적인 증가추세의 일본 이주는 1930년대에 들어서며 성숙기를 맞이했다. 1930년 공식통계에서 재일한인은 40만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1938년에는 80만 명을 넘었다. 초기 이주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예정하고 도일하였으나, 1930년대의 이민자들은 일본 내 정주를 위해 가족단위로 도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재일 조선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국가총동원을 실시하고 비상조치를 취했다. 식량과 원료, 그리고 노동력의 강제적인 동원이 실시되었다. 강제연행으로 많은 한인들이 탄광, 군수공장, 전장으로 징용되었고, 이곳에서 강제노동과 전투 등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만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재일한인의 수는 급증하게 되었고. 1944년에는 193만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며 강제 동원되었던 한인들은 대부분 귀국하여 1947년에는 53만 명의 한인들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일본은 귀국을 희망하는 한인들에게 현금 소지액을 1,000엔으로 제한하였고, 일찍 일본으로 넘어가서 이미 생활터전을 마련한 사람과 귀국선을 타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재일동포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영국·중국·소련에 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한반도의 남북 대립과 마찬가지로 재일한인사회에서도 대립관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인사들이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탈퇴하여 1946년에 재일대한민국민단(민단)을 결성하였다. 반면 조련은 북한 추종방침을 확정하여 1955년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를 결성하였고, 1959년부터 북송사업을 실시하여 1984년까지 총 9만 3천명을 북송시켰다. 일본 정부의 차별 정책과 노동시장에서의 배제로 힘겨운 삶을 살았던 재일동포들은 도쿄와 오사카에 코리아타운을 형성하였고, 파칭코나 고무신발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는 소프트뱅크, 신한은행, 롯데, 다이와제관, 헤이와, 마루한, MK택시 등 자본력을 갖춘 재일한국인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3. 러시아·중앙아시아

    2017년 외교부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유럽지역에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는 국가는 우즈베키스탄(181,077명)이며, 그 다음으로는 러시아(169,638명), 카자흐스탄(109,133명) 순이다. 타 유럽국가의 거주자격별 통계와는 다른 양상을 띠는데, 이 세 나라에서는 재외국민(영주권자, 일반체류자, 유학생)보다 외국국적(시민권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 세 나라의 한인이주 역사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60년 청과 러의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연해주가 러시아로 귀속되고, 1869년 함경도 지방의 기근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급증했다. 한인들의 뛰어난 농업기술력과 근면함으로 농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자 러시아에서는 호의적으로 한인들의 귀화를 허용했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은 많은 한인들로 하여금 정치적 망명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도 일제의 압제를 피해 연해주로 넘어오게 되었다. 1912년 당시 연해주 내 한인의 수는 6만2천명에 달하였는데,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운동가와 기존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만주뿐만 아니라 연해주도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사회주의혁명으로 무너지고 권력을 탈취한 소비에트는 1937년 17만 명에 달하는 이 지역 한인들을 ‘국경 지역 긴장 완화’, ‘한인 스파이 차단’, ‘중앙아시아 농업 활성화’ 등의 이유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로써 한인사회의 중심이 연해주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한 것이다. 1937년의 강제이주로 인해 70년 간 개척해놓은 연해주 한인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며, 열악한 이주열차 안에서 다수의 노약자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게 하였다. 한 달 만에 열차에서 내린 곳은 황무지와 습지대였는데, 추운 겨울을 피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토굴과 땅집, 움막 만들어 겨울을 보내야만했다.

    이들은 강한 생존력과 농업기술로 갈대밭을 논으로 개간하고 품종을 개발하며 집단농장(콜호즈)을 조직했다. 한인들은 벼품종 개발과 획기적인 생산량 증대로 타 민족에게 모범이 되며 노동영웅 칭호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타국에서 공을 세워 인정받기를 원했던 한인들은 자진 입대하였고, 후방의 광산이나 군수물자 증산에 주로 배치되었다. 이들의 공로는 다민족 사회 내에 한인들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거주이전의 자유가 생기자 고려인들의 높은 교육열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59년 한인들의 농촌 거주율이 70%에 육박했으나, 1970년에는 59.5%가 도시에 거주하였고, 1999년에는 고려인 인구의 86%가 도시에 거주했다. 이들 고려인은 현재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다양한 전문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4. 미국

    1830년대부터 하와이의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들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에 중국, 일본의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는데, 1903년 사탕수수 농장에 한인들이 계약 노동자로 도착하면서 한인들의 미국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약7천명의 한인들도 계약노동자로 하와이에 유입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20대 독신 남성이었는데 이들과의 결혼을 위해 사진신부 1천 명 가량이 추가 이주하여 가정을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약 1천명)는 미국 본토의 농장이나 건설 현장 등 더 높은 수입을 찾아 미국 본토의 캘리포니아로 재이주 하였다.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는 정치적 망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40년까지 891명이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한인 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하였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세 부류(노동자, 사진신부, 유학생)로 구성된 한인 이민 사회는 1945년 해방까지 하와이에 6천5백 명, 미국 본토(캘리포니아)에 3천 명가량으로 집계되었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을 치루며 1950년부터 1964년까지 약 6천 명의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2000년까지 미군의 배우자로 이민을 떠난 한인의 수는 약 10만 명에 달했다. 6.25 전쟁은 많은 전쟁고아와 혼혈아 문제를 낳았는데 1954년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입양사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2002년까지 약 10만 명이 미국가정에 입양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편 유학 이주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1965년 미국 이민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약 6천 명이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65년 개정된 미국이민법은 한인들의 이민을 급격히 증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으로 귀화하거나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한인들은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을 초청할 수 있었고, 의사나 기술자, 간호사와 같이 특별한 기술을 소지한 한인들의 이민도 허용하였다. 연 3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민을 갔으며, 2세들의 출생으로 1950년 1만 명에서 2000년에는 1백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현재는 미국 전역에서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경제적 기여뿐만 아니라 정치 참여도 활발히 하며, 사회의 한 축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5. 중남미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대농장에서 에네켄(한국말로는 하얀 마라고하며 노끈이나, 밧줄, 로프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한다. 잎사귀는 다육질로 두껍고, 단단한 가시가 솟아 있다.)
    의 수요가 날로 증가하자 1905년 영국인 존 마이어스(John Mayers)와 일본인 히나타 테루마케는 멕시코에 대하여 큰 돈을 벌 수 있고 지상낙원으로 묘사하며 전국에 이민광고를 유포하였다. 멕시코를 하와이 정도로 여긴 농민, 몰락양반, 노동자 계층의 한인들이 모집 6개월 만에 총1,033명(257가족, 독신자 196명)이 모여 멕시코행 배에 승선했고, 이들은 22개의 에네켄 농장에 분산되어 무더위와 굶주림 속에서 4년간 노예와 같은 가혹한 계약노동에 시달렸다. 마침내 4년간의 계약이 끝났지만 그들의 저임금은 귀국여비마저 되지 못하며 일부는 미국으로 가거나 국경과 인접한 티후아나로 이주하여 잡역노동을 하게 되었다. 특히 1921년에는 290여명이 사탕수수 산업이 활성화된 쿠바로 재이주를 시도하였으나,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사탕수수가격이 폭락한 직후였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쿠바의 에네켄 농장이나 잡역 노동에 종사하며 집단마을을 이루어 생활을 했다. 특기할 것은 멕시코와 쿠바에서의 가혹한 삶의 환경 속에서도 우리 한인들은 독립을 갈망하며 군사학교, 한국어학교를 세우거나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정부는 해외이주법을 제정하여 기획이민을 계획하였다. 정부는 해외로 인구를 내보내 인구 압력을 줄이고 그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확보하고자 했고, 반대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서는 농토를 개간하여 경제 발전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1965년까지 총 193세대가 브라질로 농업이민을 떠났는데, 이들 대부분은 농업의 경험이 없었으며 도착한 곳도 농토가 아니라 황무지였다. 결국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대도시로 이주하여 행상과 봉제업을 겸하며 생활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인들은 자본과 기술력을 가진 새로운 이민자들과 결합하고 전문의류상가로 진출하면서 현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의류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6. 유럽

    유럽으로의 한인 이주는 다른 지역보다 역사가 짧고 규모 또한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6.25 전쟁 이후 북유럽으로의 결혼이주나 입양, 서유럽으로의 유학이 계속되어왔지만, 유럽 이주의 가장 큰 특징으로 노동이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중남미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 제정된 해외이주법과 유럽의 인력부족사태가 맞물려 정부는 해외 인력 수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스페인으로는 원양어선 종사자, 영국으로는 병아리감별사 등이 한국을 떠나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유럽이주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파독 광부와 간호사이다. 1963년 한국과 독일 간 기술협정이 체결되고 파독광부선출위원회가 구성되면서 247명의 한인이 독일의 광산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3년씩 계약하여 교체하는 방식으로 1977년까지 8,395명의 한인들이 광부로 근로하였다. 한편 1965년 독일병원협회가 한국 해외개발공사와 계약을 체결하여 간호사들의 이주도 시작되었다. 이들도 광부와 마찬가지로 3년 단위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1977년까지 10,371명이 독일에서 간호사로 종사하였고, 한인특유의 정신력과 성실함, 그리고 간호능력으로 장기체류를 허가받아 많은 간호사들이 독일 사회에 정착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부와 간호사 대부분은 미혼으로 이들 간 결혼을 통해 장기체류를 하며 다양한 직종에서 활약하였고, 이들이 송금한 외화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Ⅲ. 결론

    이상에서와 같이 한인들의 해외이주는 지역별, 그리고 시기별로 상이한 특징을 나타낸다. 186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이주는 조선의 빈곤과 일본의 수탈 및 합방에 의한 경제적 이유나 정치적 이유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중남미에서 주로 농민, 군인, 노동자들이 귀국을 염두에 두고 떠난 임시체류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배와 남북의 대립 등 혼란한 국내외의 정세 속에 차별과 핍박 등 가혹한 환경을 스스로 헤쳐 나가며, 터를 일구고 전통문화와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며 정주하였다. 20세기 중엽부터는 전과 달리 대규모의 이민이 줄었으며, 한반도 주변 국가보다는 미국이나 유럽, 남미 등 다양한 국가로 진출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로 중산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애초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이주하여 현지 국가에서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또한 다른 민족보다 높은 교육수준으로 이제는 이주국가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세계적인 냉전체제로 중국, 러시아, 쿠바로 이민을 떠난 한인들의 접근과 교류를 막았고, 이들은 현지 사회에서 한국과는 단절된 채 삶을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 점차 잊혀졌던 우리 동포들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며, 국가차원에서도 한국어 보급이나 후손들의 초청 행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범주의 지원과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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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표, 이화정, 2017, 『재외 한인 동포 생활문화 현지조사보고서 : 고려인의 목소리』, 국립민속박물관.
    서성철, 2004, “멕시코 한인이민 역사”, 『21세기 재외동포정책의 바람직한 방향 : 일제식민지하 이주 재외동포의 현황과 과제 자료집』, 국회 재외동포문제연구회.
    외교부, 2017, 『재외동포현황』.
    윤인진, 2003, “코리안 디아스포라 : 재외한인의 이주, 적응, 정체성”, 『한국사회학』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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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윤수, 김해란, 2009, “한국인의 이주역사에 관한 일고찰 : 중국과 일본거주 한인역사 재고”, 『글로벌 디아스포라 경제와 문화적 이해』, 전남대학교.
    정근식, 2004, “한인 디아스포라 연구의 두 개의 진전”, 『황해문화』.
    김영목, 2003, “미국 서부 한국인의 역사에 관한 개요”, 『한국사론』,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재외한인의 역사” http://theme.archives.go.kr/next/immigration/viewMain.do

    Where is our home

    Flow of Korean Diaspora

    Gyungil Lee /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Ⅰ. Introduction

    ‘Dispersed people.’ Diaspora which means people who involuntarily left their homeland originated from the Jewish people who left their home due to Babylonian captivity in the 6th century B. C. and lived in a foreign country. Gradually expanding its original meaning, diaspora refers to not only the Jews but a variety of people such as communities exiled to overseas countries, refugees, ethnic minorities, political exiles and immigrant workers and it can be termed ethnic separation or dispersion in Korean.

    As the term diaspora started to be comprehensively used, the academia raised discussions on its significance and features. Defining diaspora as ‘community of minority group exiled to overseas,’ William Safran presented the following six conditions to separate it from migrant community.(Yun, Injin. 2003. “The Korean Diaspora: Migration, Adaptation, and Identity of Overseas Koreans,” 『Journal of Korean Sociological Association』 37(4). pp.102~103.)


    <Table 1> Definition and Features of Diaspora
    William Safran Robin Cohen
    Definition Community of minority group exiled to overseas Victim, labor, trade, empire and culture diaspora Victim
    (When people leave homeland and wander around due to events such as political persecution, slavery, genocide, etc.), Labor (When emigrant, indentured laborers form an ethnic community), Trade (When people leave homeland and form an ethnic community for commerce), Empire (When a community is established after colonization, Culture (When a common identity is built through immigrants’ culture or lifestyle)
    Conditions 1. Moving from a particular area of origin to a foreign country’s marginal place
    2. Isolation from the society of current residence
    3. Having collective memories and myths about homeland
    4. Considering homeland as their true home and ultimate destination to go back
    5. Commitment to homeland’s restoration and retention
    6. Keeping relationship with homeland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where their identity is formed
    ※ Three conditions added to Safran’s six conditions
    7. Expansion of population from homeland for labor, trade and colonization
    8. Empathy and a sense of solidarity with the same race in a foreign country
    9. Possibility of indigenous, creative and abundant life in society of residence country that allows multiculturalism
    Robin Cohen categorized diaspora as victim, labor, trade, empire and culture and added three conditions to those of Safran’s to expand the notion of diaspora. Based on existing researches, diaspora can be largely characterized by dispersion and immigration from homeland, retention of homeland’s culture and identity and solidarity.

    Domestic studies on Korean diaspora have become active with the end of cold war when it was hard to access Koreans living in China or the Soviet Union. Established in 1988, Society of Overseas Koreans celebrate its 30th anniversary this year with Korean scholars both home and more than ten countries abroad, publishing Journal of Society of Overseas Koreans three times a year. Collapsing of the Soviet Union in 1991 and establishment of Korea-China diplomatic relations in 1992 gave impetus to their activity. As to study on overseas Koreans, achievements of professor Yun Injin (Department of Sociology, Korea University) are remarkable; in 『Korean Diaspora』 (Korea University Press) published in 2004, he conducted surveys in major immigrational areas including the Americas and Canada as well as China and Japan and comprehensively covered circumstances of Koreans in those societies. Results are also appearing at a national level. Ministry of Foreign Affairs examines and publishes present conditions of overseas Koreans biennially. Though the data is estimate based on demographics in country of sojourn, research data of Korean association and direct survey and consequently it has some issues of accuracy, it is widely utilized as basic material for overseas Korean study, policy making and domestic enterprises’ overseas expansion and with Overseas Koreans Foundation established in 1997, studies on overseas Koreans are supported as well.


    <Table 2> Statistics on overseas Koreans (2011~2017)
    ※ Source : Present conditions of overseas Koreans 2017,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11 2013 2015 2017 Percentage(%) Year-on-Year
    increase/
    decrease(%)
    Total 7,175,654 7,012,917 7,184,872 7,430,688 100 3.42
    Northeast Asia Japan 913,097 893,129 855,725 818,626 11.02 -4.34
    China 2,704,994 2,573,928 2,585,993 2,548,030 34.29 -1.47
    Subtotal 3,618,091 3,467,057 3,441,718 3,366,656 45.31 -2.18
    Southern Asia
    and Pacific
    453,420 485,836 510,633 577,791 7.51 9.24
    North America US 2,075,590 2,091,432 2,238,989 2,492,252 33.54 11.31
    Canada 231,492 250,993 224,054 240,942 3.24 7.54
    Subtotal 2,307,082 2,297,425 2,463,043 2,733,194 36.78 10.97
    Central and
    South America
    112,980 111,156 105,243 106,794 1.44 1.47
    Europe 656,707 615,847 627,089 630,693 8.49 0.57
    Africa 11.072 10,548 11,583 10,853 0.15 -6.30
    Middle East 16,302 25,048 25,563 24,707 0.33 -3.35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has published reports on areas such as China, Uzbekistan, Japan and US since 1996 in order to understand our ethnic identity and in 2016, it examined Goryeoin (Russian Koreans) in Maritime Province Ussuriysk and published 『Field Survey Report on Overseas Koreans' Living Culture : Voice of Goryeoin.』 It is a valuable record with oral statement and photos of Goryeoin’s life through first to fourth generation immigrants. As a part of 70th anniversary of national liberation, National Archives of Korea also published 『History of Overseas Koreans with Records : Times of Immigration, Settlement and Development』 with three volumes of Asia, America and Eurasia·Europe the same year which contains a vast body of photos, documents, letters, articles, etc. This book has 1,065 pieces of data on Korean immigration collected from domestic and foreign agencies and individuals and organizes 150 years of Korean immigration starting from 1860s through chronological and regional approach.

    Prior to World Korean Grand Art Festival, this article is to look through immigration history of overseas Koreans in order to raise understanding and sympathy for the coming event and it is a summary based on the aforementioned volumes of Asia, America and Eurasia·Europe on 『History of Overseas Koreans with Records : Times of Immigration, Settlement and Development』 published by National Archives of Korea.

    Ⅱ. Body

    <Table 3> Comparison of overseas Koreans in different regions
    ※ National Archives of Korea, History of Overseas Koreans
    (Chronological change of overseas Korean)
    China Japan CIS US Central and
    South America
    Stage 1 1863-1910 1910 이전 1863-1904 1903-1905 1905-1921
    Stage 2 1911-1930 1910-1937 1905-1937 1906-1945 1922-1956
    Stage 3 1931-1945 1938-1945 1938-1945 1946-1964 1963-1971
    Stage 4 1946-1992 1946-1989 1946-1991 1965년 이후 1972-1980
    Stage 5 Since 1992 Since 1989 Since 1991 Since 1980
    Generation composition Mainly with 2nd and 3rd generation Mainly with 2nd and 3rd generation Mainly with 3rd and 4th generation Mainly with 1st generation Mainly with 1st generation
    Region of origin Before 1930 : Current North Korean region(Hamkyong Province, Pyongan Province)
    After 1930 : Diversified to overall Korean Peninsula
    Current South Korean region(Gyeongsang Province, Jeolla Province, Jeju Province) Current North Korean region(Hamkyong Province, Pyongan Province) Mostly people from South Korea and a minority of displaced people Before 1921 : Seoul, Incheon
    After 1963 : Mostly people from South Korea and a minority of displaced people
    Motivation for immigration Mainly for economic reasons
    (economic nomad)
    Political motivation (independence movement) also affected
    Mainly for economic reasons
    (labor immigration)
    Forced conscription during 1937-1945
    Mainly for economic reasons
    (economic nomad)
    Political motivation
    (independence movement) also affected
    Mainly for economic reasons (early labor immigration and middle class immigration in the late phase)
    Sociocultural reason (children’s education) also affected
    Mainly for economic immigration (early labor immigration and agricultural immigration and investment immigration in the late phase)
    Stops for reimmigration to North America
    Class background Many people were more of agricultural nomads pushed by famine and oppression. Many people were more of farmers, laborers, sojourners and forced immigrants. Many people were more of poor agricultural nomads pushed by famine and oppression. Early phase : Farmer, laborer
    Middle phase : Internationally married female, war orphan, foreign student
    Later phase : Highly-educated people, middle class
    ※ They were more of sojourners in the early phase but became settled immigrants afterward.
    Early phase : Soldier, farmer, laborer
    Middle phase : Highly-educated people, middle class
    ※ They were more of sojourners in the early phase but became settled immigrants afterward.

    1. China

    As shown in the Statistics on overseas Koreans, the entire overseas Koreans amount to 7.4 million as of 2017 and approximately one third of them live in China. Involuntary immigration to China dates back to Manchu Invasion in 1636. Emperor Taizong of Later Jin established Qing, invaded Joseon and took two princes of King Injo and six hundred thousands of our people prisoner. They went into the battlefield or become slaves and only very few of them are told to come back to Joseon. Immigration to China began in earnest in the late 19th century; people left for agricultural immigration as economic nomad as hardships of life got worse due to drought, famine, riot and frequent war with despoliation by Western powers in the 19th century Joseon. Qing and Russia signed a treaty that Maritime Province area is designated as Russian territory in Beijing in October 1860 and in order to forestall Russia’s ambition to invade Manchuria and to reinforce actual ruling, Qing encouraged cultivation in Manchuria region and condoned immigration of Joseon people, which was legalized in 1883.

    Early immigration to overcome hardships of life was also in line with political purposes after Gando Agreement in 1909 and Korea-Japan Annexation in 1910. Mass of farmers who lost their land due to oppression of Japanese Empire and independence activists emigrated and Manchuria and Maritime Province were the center of independence movement. The number of Koreans in Gando area reached 460 thousand in 1920 and they built independence movement base and organized Independence Army, which led victory of Bongo-Dong Battle and Cheongsanri Battle. After Manchurian Incident in 1931, Japanese Empire came to actually rule over Manchuria region and for the purpose of Manchuria development, the Japanese Empire forced immigration. Approximately 640 thousands of Koreans lived in Manchuria in 1931 but due to the Japanese Empire’s collective immigration policy, the number of Koreans in Manchuria counted up 1.45 million in 1940. Among Korean residents in China formed as described above, Korean people conducted ethnic education and anti-Japanese struggle.

    The Japanese Empire was finally defeated in 1945 and a part of Koreans (about 65 thousand) fought in Chinese Civil War for Chinese Communist Party. Credited for sacrifice of anti-Japanese struggle and liberation struggle engaged with Chinese, Koreans were allowed to form 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in Jilin Province as an ethnic minority and defined as Joseonjok, an official Chinese ethnic minority. As Korean enterprises have actively expanded to China after establishment of Korea-China diplomatic relations in 1992, a number of Koreans are newly heading to all over China and 800 thousands of Koreans who left their homeland before independence are coming back to Korea and making a new society.

    2. Japan

    Though Joseon people’s residence has already been identified around Gapsin Coup in 1884, it was after Korea-Japan Annexation in 1910 when immigration to Japan started in earnest. As the Japanese Empire occupied Joseon, they conducted a broadscale land survey project and private land which was not reported to Land Research Bureau was all confisca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Farmers who consequently lost their land emigrated to Japan for a higher wage. Though it was only a few, intellectuals also left for Japan to study. Forty thousands of Koreans were engaged in simple labor such as coal mine, construction, textile manufacturing, logging and the like in 1920, residing mainly in Kyushu, Hokkaido, Osaka, Fukuoka, etc. Continuously increasing immigration to Japan matured in 1930s. According to official statistics in 1930, Korean residents in Japan were reported as 400 thousands and then exceeded 800 thousands in 1938. Early immigrants expected to go back to Korea but those in 1930s headed to Japan with family members in order to settle in Japan, which served as foundation to form society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s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War broke out in 1937 and 1941, the Japanese Empire enforced national mobilization and took emergency measures. Food, raw materials and workforce were compulsorily mobilized. Due to compulsive force mobilization, a mass of Koreans were drafted to coal mine, armaments factory and battlefield and they were greatly sacrificed there due to forced labor and combats. The number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rapidly increased that way and it reached 1.93 million in 1944. As the Japanese Empire was defeated in 1945, most of Koreans subject to compulsory mobilization came back to Korea and 530 thousands of Koreans remained in Japan in 1947. Japan restricted Koreans who hoped to come back to their homeland to only have 1,000 Japanese yen and people who left for Japan in early phase and lived a stable life and those who failed to take a ship back to Korea gathered and formed a new society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fter liberation, Moscow Meeting of Foreign Ministers in December 1945 decided trusteeship in Korean Peninsula by US, UK and Soviet Union, which incurred antagonistic relationship in society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the same as confrontation of North and South on Korean Peninsula. Figures who opposed to trusteeship withdrew from Feder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organized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in 1946. Feder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on the other hand, determined to follow North Korea as their policy and organized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in 1955 and started a project of repatriation to North Korea in 1959, which repatriated 93 thousands of people until 1984. Korean residents in Japan who suffered from hardships of life due to Japanese government’s discrimination policy and exclusion from labor market formed Korea Town in Tokyo and Osaka, leading in pachinko and rubber shoes industry. Enterprises with capital strength owned by Korean residents in Japan are emerging such as SoftBank, Shinhan Bank, Lotte, Daiwa Can, Heiwa, Maruhan, MK Taxi, etc.

    3. Russia·Central Asia

    According to present conditions of overseas Koreans in 2017 presented by Ministry of Foreign Affairs, it is Uzbekistan (181,077 residents) that the most Koreans live in European area, followed by Russia (169,638) and Kazakhstan (109,133). It differs from statistics on residential qualification in other european countries; foreign nationals (citizen) are far more predominant than Korean nationals residing abroad (permanent resident, general sojourner, foreign student) in these three countries. As in the case of immigration to China, history of Korean immigration to these three countries dates back to 1860s. Maritime Province became Russian territory for 1860 Beijing Treaty between Qing and Russia and due to famine in Hamkyong Province, Korean immigrants from Hamkyong Province and Pyongan Province to Maritime Province sharply increased. As Koreans’ exceptional agricultural technology and diligence were of a great help to agricultural development, Russia favorably accepted Koreans’ naturalization.

    Eulsa Treaty and Korea-Japan Annexation respectively in 1905 and 1910 drove many Koreans to be political exiles. In addition, farmers who lost their land due to the Japanese Empire’s land survey project went to Maritime Province in order to avoid oppression of Japanese imperialism. The number of Koreans in Maritime Province reached 62 thousands in 1912 and exiled activists for independence movement and Koreans who had already lived there carried on independence movement together, which made Maritime Province as well as Manchuria the center of anti-Japanese movement. Imperial Russia collapsed with socialist revolution in 1917 and soviet seized power; they forced 170 thousands of Koreans to emigrate to Central Asia in the name of ‘relief of tension in border area,’ ‘keeping off Korean spies,’ ‘agricultural activation in Central Asia.’ Thus, the center of Korean residents society moved from Maritime Province to Kazakhstan. Koreans’ base in Maritime Province built for 70 years was totally deprived due to forced immigration in 1937 and the tragedy that a number of the elderly and infirm died in poor immigration train unfolded. When they got off the train in a month, it was all about wasteland and wetland so they should make dugout and mud hut to get through harsh winter.

    They cultivated reed beds into rice paddies with strong viability and agricultural technology, developed new varieties and organized collective farms (kolkhoz). With rice varieties development and remarkable production increase, they served as an example to other ethnic groups, the title of hero worker conferred on them. As the Second World War broke out in 1941, Koreans who wanted to be credited with contribution in a foreign country volunteered for military service and they were mainly deployed at mines or armaments plants for increase production in the rear. Their contribution highlighted existence of Koreans yet again within the multi-ethnic society. As they were given freedom of movement after Stalin died in 1953, Goryeoin started to immigrate from farm villages to cities with fervor for education. In 1959, 0% of Korean residents lived in farm villages; 59.5% of them resided in cities in 1970 and 86% of Goryeoin population lived in cities in 1999. Currently, Goryeoin plays an active part in various professional areas in Kazakhstan and Uzbekistan.

    4. US

    Large-scale sugar cane farms in Hawaii had needed cheap workforce since 1830s and thus, Chinese and Japanese laborers emigrated on the big figure and as Koreans arrived at sugar cane farms as indentured laborers in 1903, which was the beginning of Koreans’ immigration to America. Approximately 7 thousands of Koreans came in Hawaii as indentured laborers from 1903 to 1905. Most of laborers then were unmarried men in their 20s and about a thousand of picture brides also emigrated to get married and start a family with them. Some of them (about a thousand of immigrants) remigrated to California in the continental US for higher income from farms and construction sites in the mainland. As in the case of China and Russia, political exiles came in after Korea-Japan Annexation in 1910. Eight hundred and ninety-one people immigrated to US as foreign students until 1940 and grew up as political leaders in Korean society, leading independence movement abroad. Korean immigrants’ society composed with these three sorts (laborer, photo bride, foreign student) was of 6.5 thousands in Hawaii and 3 thousands in the continental US (California) until liberation in 1945.

    Going through the Korean War after liberation, approximately 6 thousands of women married American soldiers and immigrated to US and the number of Koreans who emigrated to US as spouse of American soldiers reached 100 thousand by the year of 2000. The Korean War raised issues of many war orphans and biracial children and to solve the problems, government started international adoption project in 1954. About 100 thousands of children were estimated to be adopted in US family until 2002. On the other hand, immigration for study continued even after liberation and until US immigration law was revised in 1965, approximately 6 thousands of people immigrated to US for study.

    US immigration law revised in 1965 promoted rapid increase of Korean immigration. Koreans who were naturalized as Americans or held permanent residency could invite family remaining in Korea to US and immigration of people with special skills such as doctors, technicians and nurses was also allowed. Thirty thousands of Koreans emigrated annually and as they gave birth to their children, the number of Korean immigrants was ten thousand in 1950 and it grew to 1 million in 2000. Today, Koreans not only make financial contribution to American society but also are actively involved in political activities throughout US, doing their part as the mainstays of the community.

    5. Central and South America

    As henequén(Called white yam in Korean, it is used as material to make twines and ropes. Its leaves are succulent with hard thorns.) was increasingly demanded at big farms of Yucatan Peninsula in Mexico, an Englishman John Mayers and Japanese Hinata Terumake depicted Mexico as a place for raking in money and a heaven on earth and put immigration ad throughout the country in 1905. In 6-month time, total of one thousand and thirty-three (257 families and 196 singles) farmers, collapsed gentry and laborers who thought of Mexico as a place like Hawaii took a ship to Mexico and they were spreaded to 22 henequén farms and suffered from harsh contract labor with terrible heat wave and hunger for 4 years like slaves. When their 4-year contract ended, however, their low wages could not even afford their traveling expenses back to Korea and some of them went to US or emigrated to Tijuana near the border as handy man. About 290 immigrants tried remigration to Cuba in 1921 where sugar cane industry was activated but when they arrived Cuba, price of sugar cane had just drastically declined and they unavoidably worked in Cuban henequén farms or became handy man there, forming group villages. It should be noted that Koreans did not abandon their homeland; they longed for independence, established military schools and Korean language schools or raised the fund for independence and sent to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spite of harsh life in Mexico and Cuba.

    In the 1960s, Korean government enacted foreign immigration law for planned immigration. The government attempted to reduce population pressure by sending people abroad and to secure foreign currency through their remittance while also seeking economic development by cultivating farmland in Brazil and Argentina. One hundred and ninety-three households headed to Brazil as agricultural immigration until 1965 and most of them did not have agricultural experience and where they arrived was not farmland but wasteland. Most of immigrants ended up emigrating to big cities and earned their living as peddler and seamstress. Collaborating with new immigrants who had capital and technical skills in 1980s, Koreans entered professional clothing shops, currently leading clothing industry in Brazil and Argentina.

    6. Europe

    Koreans’ immigration to Europe has a brief history and is relatively insignificant compared to that of other regions. Marriage immigration to Northern Europe, adoption and studying to Western Europe has continued since the Korean War but labor immigration is the most predominant feature in immigration to Europe. As in the Central and South America, the government actively encouraged manpower export along with foreign immigration law enacted in 1960s and lack of manpower in Europe. Sailors on deep-sea fishing vessels and chicken sexers went respectively to Spain and England.

    It is miners and nurses dispatched to Germany that we should not forget about regarding our history of immigration to Europe. As technical agreement was signed between Korea and Germany along with Germany-Dispatched Miner Selecting Committee organized in 1963, two hundred and forty-seven Koreans were employed at German mines. Miners were contracted for 3 years and then replaced; total of 8,395 Koreans worked as miners until 1977. Meanwhile, Germany Hospital Association signed a contract with Korea Overseas Development Corporation in 1965 and nurses’ immigration also started. As in the case of miners, the nurses were contracted for 3 years and then replaced; total of 10,371 nurses worked in Germany until 1977 and credited with Koreans’ unique willpower, sincerity and nursing capacity, a number of nurses were allowed a prolonged stay and settled in German society. In addition, most of miners and nurses were unmarried and through their marriage, they stayed a longer period and were involved in a variety of fields; the foreign currency that they remitted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our economic development.

    Ⅲ. Conclusion

    As aforementioned, Koreans immigration has distinctive features in different regions and times. Starting in 1860s, immigration was due to economic reasons such as Joseon’s poverty, exploitation by the Japanese Empire and Korea-Japan Annexation or for political causes. Immigration from the late 19th to early 20th century was more of temporary sojourn in China, Russia, Japan, US and Central and South America mostly of farmers, soldiers and laborers, who expected to go back to homeland. However, they pulled through harsh environment with discrimination and persecution in chaotic circumstances including colonization of the Japanese Empire and South-North confrontation and cultivated and settled in while keeping traditional culture and ethnic identity. From the mid-20th century, large-scale immigration reduced than before and destinations of immigration varied including US, Europe and South America rather than countries surrounding Korean Peninsula. They were mostly middle class and their immigration was originally meant to settlement and they quickly adapted to that society. In addition, they now live a stable life in their immigration state with higher education level than other ethnic groups. Meanwhile, the cold war system that lasted after the Second World War blocked access and exchange of Koreans who left to China, Russia and Cuba and they had to live in those society, disconnected from Korea. Now we need continuous interests and supports so that our Koreans gradually forgotten through historical circumstances can maintain ethnic pride and identity and a wide range of national supports and researches is expected to be more active besides Korean language dissemination and invitation of descendants.

    ※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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